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론 음모론 (문단 편집) === 노론은 영남 기반? === '영남 노론'이란 주장의 경우 멀리갈 것 없이 국사 교과서만 들여다 봐도 박살난다. [[경상도]]는 유구한 역사 이래로 동인-남인의 텃밭이었다. 그 영향으로 현재도 영남 지역 대학의 동양철학이나 한문학 전공 교수들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퇴계의 학문을 연구하는 학회들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봐도 이사 명단에 영남 지역 대학 교수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영남의 [[유림]]이 회재와 퇴계를 추앙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이황, 조식 생전에 경상좌도엔 이황, 우도엔 조식이란 말이 떠돌았던 걸 생각하면 더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굳이 지역적으로 당파를 구분하자면 노론은 소론과 함께 조상이 되는 서인 세력이 경기-충청도 기반으로 한 기호 사림이거나 서울, 인천 기반인 경화사족이고[* 서인에게 흡수되기 이전의 훈구파의 기반도 마찬가지로 서울, 인천, 경기도, 충청도 지역이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한명회]]도 본적을 충청도에 두고 있을 정도였다.][* 그 외에 강원도는 그 당시에 서인과 남인의 세가 비등비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서인 집권기에는 서인이 우세했고, 남인 집권기에는 남인이 우세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이루어질 때는 노론과 소론의 세가 비등비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남은 [[남인]], [[북인]]과 가까웠다.[* 영남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심하던 시절에는 사림파의 본거지이자 텃밭 노릇을 톡톡히 했다. 당시 영남 출신 훈구파는 [[홍귀달]]밖에 없었다. 다만 훈구파로 흡수당하기 전의 관학파 시절에는 영남 지역에서 관학파의 세가 어느정도 있었지만 단종 때 관학파에서 핵심 축을 이루던 김종서, 황보인 세력이 계유정난으로 몰살되고 관학파의 젊은 축이자 절의파에 속하는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인 사육신 세력도 단종복위운동 때 몰살된데다가 생육신도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 남은 관학파는 훈구파로 흡수되었고, 이후부터 영남은 사학파의 후신이자 절의파, 청담파를 합친 사림파를 지지하는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 당장 남인에서 추앙받은 [[이언적]]과 [[이황]]과 [[김성일(조선)|김성일]]과 [[류성룡]]이 [[경상도|어디 출신]]인지 생각해보자. 경상도 지방에도 노론 집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정말로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효종(조선)|효종]] 때는 경상도 서인 유생들이 율곡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남인 유생들의 공격으로[* 말 그대로 집으로 쳐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추방했다.] 고향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영남 사림들은 [[선조(조선)|선조]]와 [[광해군]] 시절에는 정권을 장악할 정도로 엄청난 위세를 자랑했지만, 광해군의 대옥사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영남 사림들은 정2품 이상 벼슬을 한 사람이 기호 사림이나 경화사족들에 비해 굉장히 열세였다. 여기에 [[경종(조선)|경종]] 이후 [[이인좌의 난]] 등으로 인해 경상도는 [[반역향]]이라 하여 벼슬길이 제한되었다. 물론 영조 때 노론 세력들이 경상도 지역에 [[김상헌(조선)|김상헌]]의 사당을 세우려고 한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그냥 영남을 반역향에서 풀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남 선비들의 강한 반발로 좌절되었다.[* 영남은 남인의 텃밭이었는데 이인좌의 난 이후에 반역향에 속한 탓도 있지만 중종~광해군 시기만 해도 사림파와 북인, 남인의 본거지였던데다 은거한 학자들이 영남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성리학이 당시에 발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4대 사화와 연산군, 중종 시절에 이어진 옥사로 훈구파가 쇠퇴해버리자 세력을 모은 영남 사림들은 이 기회를 노려서 집권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인조 시절에 이어진 정치 혼란으로 인해 중앙 정치에서 훈구파의 잔여세력을 흡수한 기호 사림에게 완전히 밀렸고 이후에는 사실상 소외된 경향이 강했다.] 현대 서울 사대문안, 충청, TK, 호남, 강릉 지역에서 양반 문화가 잘 남아 있는 이유로 조선 후기에 중앙 진출의 길이 완전히 막힌 지역의 양반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이다. 참고로 [[안동 김씨]] 가문은 어디까지나 본관이 경상도 안동일 뿐이지 실제 정치적 기반으로서의 경상도와는 관련이 없는 가문이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 김씨 문정공파는 따로 장동(서울의 장동, 지금의 효자동 일대) 김씨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에서 잠시 언급한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의 경우에도 말이 안 되는 게, 조선시대의 호남 지역의 사대부들은 영남과 마찬가지로 동인/남인에 가까웠다. 단지 [[정여립의 난]] 때 서인인 정철[* 서울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을사사화로 집안이 박살난 이후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으로 내려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즉 호남 동인들을 박살낸 그도 사실상 호남 출신이다.]의 주도로 호남 유림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서 그 세력을 잃은 것이며, 시기적으로 좀 차이가 날 뿐이지 영남 유림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오히려 호남은 기축옥사 이후로 서인의 세가 강해졌고 이후에도 서인과 남인의 세가 비등비등하게 유지되다가 인조반정 이후로는 호남 지역에서 서인 경합우세, 남인 경합열세 기조가 이어지고 갑인예송 이후로는 서인 경합열세, 남인 경합우세 기조가 이어지면서 경합 지역으로 남아 있다가 경신환국 이후로는 서인의 세가 강력해졌고 기사환국 이후로는 다시 남인의 세가 강력해졌다가 갑술환국 이후로는 노론과 소론 등 서인계 정당들의 세가 강력해졌다. 특히 광산김씨의 영향으로 호남은 오히려 노론의 강한 텃밭이 되었다.[* 호남은 사림파 집권 이전에도 훈구파와 사림파의 경합 기조가 이어졌다.] [[노론]]은 '보수'가 아니고, [[남인]]은 '진보'가 아니다. 노론의 수장인 [[송시열]]은 양반도 군역포를 내야한다는 호포법에 찬성했으며, 여성이 학문에 힘쓰는 것을 장려했다. 당시 진보적인 사상가로 평가받는 실학자들 중에서도 박지원이나 [[홍대용]] 같은 노론집안 출신 인사가 많았다. 심지어 [[김정희]]는 정순왕후를 배출한 대표적인 벽파가문인 경주 김씨 출신이다. 반면 남인인 허목은 호포법에 반대했으며, 송시열이 주장한 경제정책에도 왕안석의 신법에 비유하면서까지 극렬하게 반대했다. 즉 지금의 기준으로 혹은 학문적인 차이로 노론과 남인을 보수와 진보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단 얘기다. 오히려 남인의 사상이 현대 기준으로는 보수적인 경우도 있다. 예컨대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주요 사안과 경세론에 대해서 노론과 남인의 관점을 현대인에게 보여주고 누구의 의견에 더 동의하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현대인은 노론의 관점에 더 동의하는 편이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도 출신 가문은 남인이지만 성균관 유생 시절 "율곡과 퇴계 중에 누가 더 훌륭하냐?"는 정조의 하문에 율곡이 낫다고 답했으리만큼 당색에 얽매이지 않고 노론 계통 사상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영남 유림들은 상당히 남인에 가까웠지만 초반부에는 기호 지방인 서울, 경기도, 인천이나 충청도의 서인 세력들에게 온건하게 대해줬다. 고려시대 때는 서인계 기반의 수도권, 충청도와 남인계 기반인 영남이 사이가 좋았는데 수도권 기반을 많이 가지고 있던 태조 왕건이 신라계 세력들에게 많이 잘해줬기 때문이다.[* 다만 태조 왕건의 경우, 근기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 기반도 상당했지만 태조 왕건의 진짜 기반을 본다면 그의 기반은 수도권보다는 고구려계와 패서지방 호족들 쪽 기반이 많았다. 다만 패서지방 호족들은 광종 때 숙청을 당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당시에는 고려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던 신라계 역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이뤄질 때 분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지방 신라계와 남인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 신라계로 분열되었던 듯 하다.] 본격적으로 대립이 시작된 건 조선시대인데, 조선 초중기에는 영남이 사림파의 주춧돌 노릇을 하면서 훈구파와 대립을 했다. 그러나 이 때는 철천지 원수지간처럼 싸우기보다는 사화에 저항한다는 성격이 짙었었다. 다만 선조 때부터 숙종 초까지는 나름 사이가 좋았는데 남인이 서인에 온건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송 논쟁으로 사이가 틀어지긴 했어도 경신환국 이전까지는 심하게 싸우지는 않았고, 정책경쟁 수준이었다. 그러나 경신환국 이후 남인계 기반의 지역과 서인계 기반의 지역은 서로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기 시작했고 이인좌의 난 이후로는 더 심각해졌다. 노론 음모론의 다른 부분은 과거사를 왜곡하는 수준이지만, 영남 노론 떡밥은 아예 '''역사 자체를 왜곡'''한다는 점에서 상황이 심각하다. 조선시대에 동인-남인의 텃밭이었던 영향으로 현재도 영남 유림들이 퇴계 이황을 찬양하고 영남 지역 대학 교수들이 주축이 돼서 퇴계 이황의 사상을 연구하는 단체들을 조직해 놨다. 영남 노론 떡밥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이런 사실 관계까지도 왜곡한다는 점에서 무식의 차원이 다르며 또한 매우 악의적이기까지 하며, 그리고 '''현대의 지역감정과 정치성향은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영남 전체와 호남의 지역감정이 강하게 작용함은 [[전두환]]에 의한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87년 대선, [[3당 합당]] 이후의 일이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단순히 정치 논리에 의해 '선거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선 [[대한민국/지역감정]] 문서의 [[영남 vs 호남]] 부분을 참조할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